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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주산면
구분 지명유래
내용 珠 山 面 (주산면)

百濟(백제)때는 寺浦縣(사포현), 新羅(신라)때는 蘇浦縣(소포현)에 속해서 西林郡(서림순)의 領縣(영현)이 였으며 藍浦縣(남포현), 蘇浦縣(소포현)에 속했으며 朝鮮(조선)때도 藍浦縣(남포현)에 속했다 가 朝鮮末葉(조선말엽) 高宗(고종)32年(1895年)에 藍浦郡(남포군) 習衣面(습의면) 地域(지역)으로써 深 洞外(심동외) 11個里(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改革(개혁)때 碧洞(벽동)은 熊 川面(웅천면)에 편입하고 佛恩面(불은면)의 東幕外(동막외) 16個洞里(개동리)와 深田面(심전면)의 平章里(평장리)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珠簾山(주염산)의 이름을 따서 「珠山面(주산면)」이라 하여 東五(동오), 三谷(삼곡), 花坪(화평), 倉岩(창암), 篁栗(황율), 金岩(금암), 野龍(야룡), 珠野(주야), 新九(신구), 柳谷(유곡), 甑山(증산)의 11個里(개리)를 관할하여 保寧郡(보령군)에 編入(편입)되였다. 이 곳에는 有名(유명) 한 人物(인물)이 數多(수다)히 繁出(번출)되며 特(특)히 憂國志士(우국지사)의 本(본)고장이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金 岩 里(금암리)

朝鮮末葉(조선말엽)에 藍浦郡(남포군) 習衣面(습의면)이였으나 1914年 行政改革(행정개혁)에 따라 深 洞(심동), 龍岩里(용암리), 同龍里(동용리) 一部(일부)와 佛恩面(불은면) 金塘里(금당리)를 병합하여 金塘(금당)과 籠岩(농암)의 이름을 따서 金岩里(금암리)라 하여 保寧郡(보령군) 珠山面(주산면)에 편입되었 다. 任世準先生(임세준선생)이 사시던 고장이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통 점

신곡굴 동쪽 마을로 옛날식 놋점(통점)이 있었다. 이 마을 뒷산 을 籠珠山(농주산) 이라 한다.

신 곡 굴

안터 東南(동남)쪽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다.

운 암 바 위

간재 장터 남쪽으로 있는 바위로 모양이 상여처럼 생겼다 하여 상여바위 라고도 하나, 상사가 많이 난다고 100년전부터 운암 바위로 改稱(개칭) 刻字(각자)가 지금도 있다.

청 석 다 리
간재 東南(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가운데 靑石으로 놓은 길이 10자의 다리가 있다.

山 祭 堂(산제당)

청석다리 後嶺(후영)에 매봉재 밑에 老人峰(노인봉)이 있다. 이 곳에 山祭堂(산제당) 을 모시고 있는 바 지금도 음력 정월 3日에 部落(부락)의 無事泰平(부사태평)함 을 新願(신원)하는 山祭(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祭官(제관)은 3일간 목욕제계하고 단정한 몸가짐을 하여 정성을 다하고 있다. 공동답 400평이 있 다.

동 굿 재

간재장터 西南(서남)쪽 동구에 있는 고개이며 성황당이 자리해 있다 고 해서 동굿재라 부르며, 이 밑으로 장항선에서 제일 긴 터널 이 가설되었다.

농 주 암

간재 장터 남쪽 동굿재 동쪽 籠珠山(농주산)에 있는 절이며 8.15해방 후 지었다.

농 바 위

간재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에 농처럼 생긴 바위가 있 다 해서 농바위라고 부른다.

간 재

이 마을 동쪽 부여군 홍산 방면으로 통하는 고개 이름이다. 또 한 주산면 소재지 마을을 간재라고 하며 주산면의 여러 행정기관, 학교가 있다. 장항선의 驛이 있으나 地形上(지형상) 본역은 2km 서 쪽에 있고 간이역(주산)이 있다. 매월 1일과 6일에 정기시장이 서는데 구전에 따르면 간재 장터 동남간에 복개봉이라는 앞산 이 있는데, 平山申氏(평산신씨)의 조상 산소가 있어 풍수설로 이 곳에 장 터를 개장하였다 한다.

野 龍 里(야룡리)

朝鮮末葉(조선말엽)엔 藍浦郡(남포군) 習衣面(습의면) 地城(지역)인데, 1914年 行政改革(행정개혁)때 上野里(상야리), 下野里(하야리)의 各一部(각일부)와 回龍里(회룡리)를 병합하여 野龍里(야룡리)라 해서 保寧郡(보령군) 珠山面(주산면)에 편입하였으며 李思明(이사명), 尙利鉉先生(상이현선생)이 사시던 곳이 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회 룡 골(回 龍)

보검동 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地形(지형)이 龍(용)이 도는 것처럼 생겼다 해서 회룡골이라 한다.

팽 나 무 재

회룡 서쪽 마을로 팽나무가 있다 해서 팽나무재라 부르며 지금은 그밑으로 서해철도(남포∼마량간)의 松山(송산) 터널이 뚫려 있다.

초 석 골

회룡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초석이 마을이다.
차 돌 이 마
산조개 서북쪽에 자리한 모롱이며 차돌이 많이 있다해서 차돌이마라고 한다.

보 검 동(寶 劍 洞)

산조개 마을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地形(지형)이 장갑형(藏甲形) 또는 출갑형(出甲形)이라 한다. 고려때에 군사들이 주둔해 있었던 자리라 한다. 군사가 칼을 집고 있는 곳이라 하여 보검동이라고 부른다. 육군00부대 연대본부가 주둔해 있다가 이전하였다.

장 승 백 이

옛날에 장승백이라고 부르는 자리에 지금은 논이 생겨 장승백이라고 부른다. 장승이란 地下女將軍(지하여장군), 天下大將軍(천하대장군)의 나무패로, 모든 인생의 흉액을 몰아내기 위한 심볼이다.

용 가 마 재

산조개마을 서북쪽에 자리한 고개이다. 고개모양이 가마처럼 생겼다 해서 유래한다. 옛날 이 고개에 꽃이 많이 피었다 한다.

옻 샘

고병마을 북쪽에 있는 샘이다. 물이 매우 차서 옻 오를 때 목욕을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 해서 옻샘이라고 부른다. 일명 장군샘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며 지금은 주둔부대 고급간부 사택에 사용되고 있다.

수 랑 골

보검동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옛날에 논수렁이 있어 수렁골이 수랑골로 변하였다.

쇠 마 당 골

성줏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 많아서 소를 매놓았던 곳이다.

송 산 말(松 峴)

보검동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옛날에 소나무가 많았다 해서 송현이라 부른다.

송 산 말 정 주 나 무

둘레 5아름, 높이 20m, 수령 200여년이다.

산 조 개 성 황 당

산조개 서북쪽으로 고개에 성황당이 있다. 六神(육신)과 山神(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무당들이 마을사람들과 함께 마을의 잡귀를 몰아내는 제사를 올렸다.

상 야(上 野)

오얏골 위쪽으로 있는 마을이며 마을 위쪽에 있다 해서 상야라고 부른다.

삼 거 리

보검동 위쪽에 있는 마을이며 회룡과 상야로 가는 세 갈래길이 있는 곳이라 삼거리라고 한다.

산 조 개

야룡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조개 당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 산조개라 부른다.

북 당 골

수박골 서쪽에 자리한 골짜기 이름이며 옛날에 佛堂(불당)이 있었다 해서 불당골이 변해서 북당골이라고 부른다.

병 목 안

유투나무골 남쪽의 골짜기이며 병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병목안이다.

벼 락 재

산조개 동남쪽 기슭에 있으며 옛날 벼락이 떨어졌었던 고개이다.

방 죽 안

회룡 서쪽으로 있는 마을이며 방죽(농업용소류지) 안에 있다 해서 방죽안이라고 부른다.

마 당 배 미

산조개 앞 동남쪽으로 있는 논이며 마당처럼 생겼다 해서 유래되었다.

둥 글 재

산조개 서쪽으로 있는 고개이며 붉은고개라고도 부른다. 고개가 붉은 빛이라서 유래한다.

느 진 목 이

보검동 서북쪽으로 있는 마을이며 목너머라고도 부르며 山이 늘어진 목처럼 생겼다 해서 유래되었다.

고 염 모 댕 이

산조개 남쪽에 있는 모롱이며 돌이 고여 있다는 뜻이다.

고 병(高 病)

회룡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마을이 높은 병풍처럼 되어있다 해서 유래되었다.

갓 골

북당골 서쪽 가에 있는 골짜기이다.

珠 濂 山(주렴산)

珠山面(주산면) 所在地(소재지)의 서쪽 앞에 珠玉(주옥)처럼 펼쳐진 주렴을 느린 병풍과 같다 하여 珠濂山(주렴산)이라 부르는 산이다. 멀리 오소산, 승주산을 이어오다 웅천벽동부락을 경계로 하여 독립된 웅장한 산을 이루었으니 높이는 해발 350m요, 그 둘레는 순하게 평퍼짐하여 여러마을을 이루어 서쪽은 西海(서해)바다를 끼고 있고 最高峰(최고봉)인 國帥峯(국수봉)에 올라 보면 북으로 聖住山(성주산), 오소산과 嵋山(미산)의 아미산이 첩첩이 보이고 망망한 西海(서해)의 작고 큰 섬들이 壯觀(장관)이며 남쪽으로 長項製所鍊(장항제소연)의 굴뚝이 눈 앞에 보이는 듯하다. 이곳 珠山面民(주산면민)들은 이 靈山(영산)의 精氣(정기)를 받고 태어난다 하여 珠濂山(주렴산)을 守護神(수호신)과 같이 여기고, 또한 獨立性(독립성)의 稟性(품성)을 가져 篤特(독특)한 特有(특유)의 處身(처신)을 하여 珠山面內(주산면내)의 많은 濟世爭爭(제세쟁쟁)한 人物(인물)들이 輩出(배출)된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 己未年(기미년) 獨立萬歲(독립만세)를 面民(면민)이 부른 곳도 이곳이다. 朴仁和(박인화) 先生(선생)의 出身地(출신지)이기도하다.

倭帝(왜제)의 不法(불법) 暴惡無道(폭악무도)한 壓制(압제)에서 亡國(망국)의 恨(한)을 품고 大韓(대한)의 自主獨立國(자주독립국)임을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宣言(선언)하고, 온 民族(민족)의 擧事(거사)가 1919年 3月 1日 全國坊坊谷谷(전국방방곡곡)에서 己未獨立萬歲(기미독립만세)가 震動(진동)할 때, 當時(당시) 서울 培材學校(배제학교)에서 修學中(수학중)이던 李哲源(이철원)이 서울市內(시내)에서 萬歲(만세)에 加擔(가담), 先頭(선두)에서 示威等(시위등)을 하다가 쫓기어 鄕里(향리)로 돌아와서 卽時(즉시) 儒林先輩(유림선배)들을 糾合(규합)하여 謀議(모의)하기를, 4月 16日 珠山(주산)장날을 擇(택)하여 群衆(군중)이 多數集結(다수집결)하여 獨立萬歲(독립만세)를 부르기로 結速(결속)하여 實行(실행)코저 했으나, 事前漏說(사전누설)로 장꾼보다 倭官憲(왜관헌)이 많은 지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主謀者格(주모자격) 數名(수명)만이 翌日(익일) 4月 17日 저녁에 珠濂山國帥峯(주렴산국수봉)으로 集結(집결)하여 山頂數處(산정수처)에 太極旗(태극기)를 꽂고 횃불을 켜들고 징을 치며 大韓獨立萬歲(대한독립만세)를 高唱(고창)하니 山頂(산정) 約(약)2km를 前進(전진) 珠山市內(주산시내)와 熊川市街(웅천시가)가 보이는 곳까지 震動(진동)케 하니 珠濂山(주렴산) 周圍部落住民(주위부락주민)들이 이에 호응 하는 者(자)가 많았다. 이로 인하여 倭警(왜경)이 每日(매일)같이 珠濂山下(주렴산하)의 모든 部落(부락)을 巡察(순찰)하여 無故(무고)한 住民(주민)을 毆打(구타)하는가 하면, 空砲(공포)를 쏘아 婦女子(부녀자)를 威脅(위협)하는 만행을 數個月(수개월) 繼續(계속)하여 民心(민심)이 騷擾(소요)하였었다. 여기에 主謀者格(주모자격)으로 加擔(가담)했던 분들 중에서 野龍里(야룡리) 朴奫和(박윤화)는 홀로 18日 早朝(조조)에 珠山(주산) 所在地(소재지) 복진봉에 太極旗(태극기)를 꽂고 萬歲(만세)를 高唱(고창)했으니, 保寧郡內(보령군내)는 3月 中旬(중순)까지 萬歲騷動(만세소동)이 없어 萬歲保寧(만세보령)이라 毆歌(구가)하다가, 當時(당시)의 郡守(군수) 署長(서장)의 個人的(개인적) 榮達(영달)에 支障(지장)이 유한바라 基惡感情(기악감정)이 더하여 一網打盡(일망타진) 된 主謀扇動者(주모선동자) 18名 名單(명단) 末尾(말미)이 逮捕(체포)되어 引致(인치), 갖은 惡刑(악형)의 고초를 每日(매일) 2回(회)씩 받았고, 40餘日(여일)의 獄苦(옥고)를 치르다가 笞刑(태형) 九十(구십)에서 六十丈(육십장)씩을 받고 풀려 났으나 솜바지 저고리가 피로 물들어 가죽(皮)과 같이 되었으며, 걷지 못하여 轎子(교자)로 歸家(귀가)했으나 이 餘毒(여독)으로 살에서 구데기를 파내는 이가 많았으며, 一生(일생)을 半身不隨(반신불수)로 지냈으며 일찍 작고한 분들이 많았다. 특히 이 중에서 李哲源(이철원) 博士(박사)는 上海(상해)로 亡命(망명)하여 金陵大學(금릉대학)에서 修學後(수학후) 美國(미국)으로 건너가 修學(수학), 哲學博士(철학박사)가 되었고, 大韓民國樹立後二代公報部處長(대한민국수립후이대공보부처장)을 지냈으며 그의 略歷(약역)이 빛난다.

또한 上海臨時政府(상해임시정부)의 要人(요인)으로 國內(국내)에 潛人暗躍(잠인암약)하다 逮捕(체포)되어 松林(송림) 윤길씨는 15年刑(년형)에 7年獄苦(년옥고)를 西大門刑務所(서대문형무소)에서, 全廷濟氏(전정제씨)는 咸興刑(함흥령) 務所(무소)에서 3年獄苦(년옥고)를 치른 志士(지사)와 합하여 20분들의 거룩한 뜻을 기려 珠山面民(주산면민)들이 合心(합심)하여 後世(후세)에 永久(영구)히 그 얼과 魂(혼)을 遺傅(유부)하여 精神(정신)의 바탕이 되게 하고저, 1971年度(년도)에 追慕事業推進會(추모사업추진회)를 發足(발족)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다시 1979年度(년도)에 推進委員會(추진위원회)를 再定立(재정립)하여 片石(편석)이나마 追慕記碑(추모기비)를 세웠다.

當時(당시) 萬歲(만세)부른 志士名單(지사명단)(無 順(무순))

李哲源(이철원), 尹用源(윤용원), 朴奫和(박윤화), 朴台鉉(박태현), 任文鎬(임문호), 金亮濟(김양제), 李哲圭(이철규), 尹起鎬(윤기호), 李性秀(이성수), 李成圭(이성규), 李洪圭(이홍규), 李觀圭(이관규), 李莊圭(이장규), 李恒圭(이항규), 申道休(신도휴), 李鳳圭(이봉규), 朴性夏(박성하), 尹天榮(윤천영)

이상은 倭警(왜경)에 逮捕(체포)되어 치르고 朴台鉉先生(박태현선생)같은 분은 태형 90丈式(장식) 매를 맞고, 풀려 나와서 餘毒(여독)으로 모두 殉死(순사)하였다.

珠 野 里(주야리)

朝鮮末葉(조선말엽) 藍浦郡(남포군) 佛恩面(불은면) 지역으로써 1914年 行政改革(행정개혁)때 上野里(상야리), 下野里(하야리), 佛恩面(불은면) 珠山里(주산리)의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珠野里(주야리)라 해서 保寧郡(보령군) 珠山面(주산면)에 편입되었으며 金廷濟(김정제), 任啓鉉(임계현), 金商雨(김상우), 朴性立(박성립) 先生(선생)이 사시던 곳이기도 하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닥 박 골

두란 마을 서남쪽으로 있는 마을이며 옛날에 닥나무가 밭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옥반동(玉盤洞)이라 한다.

두 란(杜 蘭)

장자골(長者谷) 東南(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옛중국의 선비 두보가 세상풍파(世上風波)를 버리고 난초를 가꾸며 놀던, 신선계곡과 닮은 마을이라 두란 이라 한다.

서 낭 당 고 개

주렴산 서쪽에 있는 높은 고개이며 성황당이 있다 해서 유래되었다.

작 은 주 렴 산

주렴산 아래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장 자 골(長 者 谷)

두란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장동 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장자가 살던 마을이며 지금도 부자샘이 있다.

큰 주 렴 산

주렴산 아래 자리잡은 큰 마을이다.

新 九 里(신구리)

朝鮮末葉(조선말엽) 藍浦郡(남포군) 習衣面(습의면)에 속해 있었다. 1914年 行政改革(행정개혁)때 新村(신촌) 一部(일부)와 九山里(구산리)를 병합하여 신구리라 하여 珠山面(주산면)에 편입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거 북 뫼

대숲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원구산 이라고도 부르며 뒷산이 거북처럼 생겼다 해서 거북뫼이다.

대 숲 골

거북뫼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대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돌 모 루

거북뫼 남서쪽으로 서천군 비인면과의 군계로 마을에 돌로 된 모롱이가 있다.

안 터

돌모루 서남쪽으로 있는 마을이다.

죽 나 뭇 골

안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대나무가 많았다 한다.

정 자 나 무

죽나무굴에 있는 느티나무는 높이 30m 수령 200여년이 되며, 구전(口傳)에 따르면 나뭇잎이 한꺼번에 푸르르면 풍년이 들고 나뭇잎이 한쪽에서 피면 흉년이 든다해서 마을에서 받드는 느티나무이다.

죽 내

죽나무굴 안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조 인 환 염 전

죽나무굴 앞에서부터 유곡리 앞까지 걸쳐있는 염전이다. 해방후 曺仁煥(조인환)이란 사람이 개척한 염전이다.

柳 谷 里(유곡리)

朝鮮末葉(조선말엽) 藍浦郡(남포군) 習衣面(습의면) 地城(지역)인 바 1914년 行政改革(행정개혁)때 수곡리를 병합하여 유곡 珠山面(주산면)에 편입되었다. 忠淸南道知事(충청남도지사)를 歷任(역임)한 바 있는 금형현 선생의 出身地(출신지)이기도 하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숫 골(隨 谷)

버들마을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이 마을 사는 사람은 장수한다 해서 노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다.

유 곡 절(寺)

버들 동네 북쪽 國帥峯(국수봉) 기슭에 있는 절로 해방후에 지었다.

짓 재

버들 동쪽으로 면소재지로 왕래하는 고개이며 지치풀이 많은 고개이다.

버 들

숫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柳谷이라 한다.

甑 山 里(증산리)

珠山面(주산면) 所在地(소재지)로부터 서쪽에 있는 珠濂山(주렴산) 너머 位置(위치)한 시루뫼는 珠濂山(주렴산)의 國帥峯(국수봉) 一名(일명) 시루뫼에서 보면 떡 찌는 시루와 같다하여 시루봉이라 하고 그 밑에 있는 洞名(동명)도 시루뫼라 한다. 이 동네는 仁祖朝(인조조)에서 左承旨(좌승지)를 지낸 全州李德溫公(전주이덕온공)이 落鄕(낙향)하여 처음으로 朝鮮式(조선식) 기와집을 짓고, 住居(주거), 始作(시작)하여 約(약) 四百年(사백년) 現在(현재) 퇴락되어 가고 있어 아쉬움이 있다. 이의 子孫(자손)이 繁昌(번창) 40餘戶部落村(여호부락촌)을 이루고 代代(대대)로 살고 있는 마을이다. 서기 1970年以前(년이전)만 해도 탁 트인 앞바다에 潮水(조수)가 들고 나감으로 인하여, 앞에 있는 소섬(牛島) 周圍(주위)가 約(약) 2km 地圓表示(지원표시)는 소가 누워있는 형이요, 모래장불이 흡사 소줄과 같이 동구어귀에 있는 동구섬에 닿았으니 소말뚝에 매어 놓은 形象(형상)과 같아 滿潮(만조)가 되었을 때 에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고 漁(어)담시수가 풍富(부)하여 富村(부촌)을 이룬 동네였다. 서기 1970年 以後(이후)에 소섬 뒤쭉뿌리부터 안으로 干拓地(간척지)를 80餘町步(여정보)를 막음으로 하여 廣括(광괄)한 農地(농지)는 만들어 졌으되, 水源(수원)이 없어 開沓(개답)을 다하지 못하고 있어 時急(시급)히 貯水地(저수지) 確保(확보)가 問題(문제)이다. 이로 인하여 소섬의 뒤 둔 부는 도자로 파 헤쳐졌고 동구섬은 形體(형체)도 없다. 自然(자연)은 훼손되고 住民(주민)은 福祉(복지)는 이룬셈이다. 現在(현재) 소섬의 바깥은 天惠(천혜)의 대합 種具(종구)의 漁場摘地(어장적지)요, 海苔養値(해태양치)의 寶庫(보고)로 年間收益(연간수익)이 높다. 甑山里(증산리)는 샛터말(新基) 돌고개(石峠) 성너머(城村) 방죽굴 송림(松林) 等(등) 六個(육개) 마을이 합하여 시루뫼에 屬(속)한 시루징자 甑山里(증산리)이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甑 山 里(증산리)

주렴산 년봉인 시루봉 아래 있는 마을이라 시루뫼라 부른다. 行政改革(행정개혁)때 內甑里(내증리)와 外甑里(외증리)를 병합하여 珠山面(주산면)에 편입하였으며 윤길, 李恒圭(이항규), 李哲源(이철원), 李昇圭(이승규) 先生(선생)의 出生地(출생지)이기도 하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돌 고 개

밖시르뫼 남쪽에 돌이 많은 고개가 있는데 돌고개라 하며 마을 이름도 이에 따랐다.

말 뚝 섬

쇠섬 앞에 있는 섬이며 말뚝모양과 같이 생겼다.

밧 시 르 뫼

시르뫼 바깥뫼쪽에 있는 마을이다.

방 죽 골

안시르뫼 서북쪽에 있는데 마을안에 방죽이 있다.

새 터 말

밖시루뫼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 생겼다 해서 새터말이다.

성 너 머

방죽굴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성벽처럼 생긴 마을이란 뜻이다.

송 림(松 林)

성너머 서북쪽으로 있는 솔밭이 우거진 곳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松林(송림)이라 부르던 마을이다. 구전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왜장들이 솔송(松)字 있는 地名(지명)은 피해 다녀 그 마을에 사는 파평윤씨의 선조가 落鄕(낙향)하는 곳이며 임진왜란 큰 역할을 한 명나라 장수이름이 李如松(이여송)이어서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쇠 섬(牛 島)

시루뫼 서쪽으로 있는 소 形局(형국)의 섬이며 밀물때는 다닐 수가 없으나, 소의 뫼모양의 높은 지대로 썰물때는 왕래할 수 있다.

안 시 르 뫼

시르뫼 마을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시 루 뫼

시루봉 아래에 있는 마을로써 증산 이라고도 한다.

倉 岩 里(창암리)

朝鮮末葉(조선말엽) 藍浦郡(남포군) 佛恩面(불은면)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改革(행정개혁)때 玉山里(옥산리), 倉村(창촌), 燕岩里(연암리), 坪村一部(평촌일부)를 병합하여 倉村(창촌)과 燕岩(연암)의 이름을 따서 倉岩里(창암리)라 하고 珠山面(주산면)에 편입하였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남 전

창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李朝時代(이조시대) 利仁道(이인도) 찰방(察訪)에 딸린 藍田驛(남전역)이있었던 마을이다.

남 전 역(터)

李朝(이조)때 말 10필 노비 95명이 있었던 驛(역)인데 1896년에 없어져서 터만 남아있다. 藍浦縣(남포현) 관내에 남천 院(원)과 橫川院(횡천원)이 있었는데 미산면 개화리에 횡천원이 있었다 한다.

달 은 고 개

남전 동쪽에 있는 마을로 월현(月峴)이란 고개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다. 달이 쉽게 뜨고 쉽게 져서 달이 숨는 고개라는 뜻이다.

운 봉 산 과 물 탕

산이 높아 (산높이 320m)구름과 안개가 많이 끼는 산이라 하여 운봉산이며 일명 逆頭山(역두산)이라고도 한다. 그 기슭에 물탕이 있는데 물이 좋아 정월 보름날에는 목욕하고 마시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미 륵 모 탱 이

창말 서쪽끝 웅천면과의 경계에 미륵 부처상이 서있다. 이 미륵의 눈을 긁어 다려먹으면 낙태의 효험이 있다 하여 현재 눈자리가 움푹 파져 옛모습이 손상되어 가고 있다.

말 둠 벙

창말 서쪽 국도변 마을을 비선거리 라고 하는데 옛 관찰사의 기념비가 서 있는 곳의 냇가의 말둠벙이 있는데 그 옆 산새가 말 모양일뿐 아니라 역마의 말을 닦고 물마시게도 하였다.

제 비 바 위(燕 岩)

창말 남쪽에 제비모양의 바위가 있어 이 마을을 제비바위 또는 제배라 한다.

창 말

역말 서북쪽으로 있는 마을로써 朝鮮(조선)때 藍浦縣(남포현)의 南倉庫(남창고)가 있었으며 지금도 창고터가 남아 있다.

花 坪 里(화평리)

朝鮮(조선)때 藍浦郡(남포군) 佛恩面(불은면)의 지역으로 1914年 行政改革(행정개혁)때 坪村(평촌), 泉谷里(천곡리), 井谷里(정곡리)의 各一部(각일부)를 병합하여 花坪里(화평리)라 하여 珠山面(주산면)에 편입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배 챙 이

화산 북쪽으로 있는 모롱이다. 즉 웅천천 중류로써 옛날에는 여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매었다 한다.

화 산

삿각재 동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이름화산에서 마을 이름을 따랐으며 뒷산을 王峯(왕봉)이라 하는데 王이 태어날 산세라 하여 王峯(왕봉)이라 한다하면 지금 李朝(이조)때의 역적 이괄의 묘소라고 구전되는 묘지가 있으나 그 진부는 알 길이 없고 무슨 연유인지 부러진 빗돌이 서있다.

삿 각 재

화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모양이 삿갓처럼 생겨서 삿각재가 한다하여 약현이라고도 한다. 마을 뒤에 주산면에서 제일 넓은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동 막 산(東 幕 山)

주산면 화평리와 웅천면 평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237m인데 옛날 나무토막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해서 동막산이라 부른다.

매 바 위

웅천면 평리지역이나 교통이 편리해 낚시등 놀이터로 면민의 으뜸가는 관광지이다. 바위모양이 매처럼 생겼다 하여 매바위라 전한다.

東 五 里(동오리)

朝鮮(조선)때 藍浦郡(남포군) 佛恩面(불은면)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改革(행정개혁)때 東幕里(동막리), 門洞(문동), 五堂里(오당리)와 深田面(심전면)의 平章里(평장리)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東五里(오동리)라 하여 珠山面(주산면)에 편입되었으며 姜永錫 先生(강영석선생)이 출생한 곳이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곰 골

오상마을 서쪽의 마을로 옛날 뒷산에 곰이 살았다 한다. 곰골 서쪽에 있는 미산면 평라리로 통하는 고개를 곰재라 부른다.

선 돌

곰골 서쪽에 자리한 마을로 선돌이 셋이 있는데, 옛날 여장부가 고깔바위를 쓰고 마당바위를 치마에 싸 안고 지팡이바위를 짚고 가다가 치마폭이 터져서 마당바위가 떨어지는 바람에 세 바위가 함께 우뚝 서 있게 되어 선돌이라 부른다 한다.(先史時代(선사시대)의 유물)

선 골

선돌 안 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정 주 안

동막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이며 마을 입구에 정자나무가 있는데 수령 700년이 된다 하며 정자나무 안동네라는 뜻이다. 이 정자나무는 고려 말엽에 한 장수가 지나다가 이곳 山水(산수)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쉬어가다가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심고간 나무라고 구전되어 오고 있다.

세 족 암(洗 足 岩)

정주안 앞냇가에 있는 바위로 옛 名人(명인)들이 발을 씻었다고 하며, 그 뒷산이 明德山(명덕산)인데 名員(명원)들이 살아서 포수들도 들어오지 않는 선경이었다 한다. 남포 5義士(의사)의 한 분이신 白秋江(백추강) 先生(선생)이 탄생하신 곳이다.

수 문 재

안골 뒷산에 水門(수문)재가 있는데 안개가 서남쪽으로 넘어 오면 3일안으로 비가 오며 수력발전용 댐공사를 하다 중단된 곳이다.

오 상(五 相)

곰재 밑의 마을로 조선조가 싫어 정승 5명이 은거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마을이다. 保寧5烈士(보령5열사)이신 秋江(추강) 白樂實(백낙관) 先生(선생)이 出生(출생)하신 곳이다.

三 谷 里(삼곡리)

朝鮮末葉(조선말엽) 佛恩面(불은면) 地域(지역)인데 1914年 改革(개혁)때 東谷里(동곡리), 泉谷里(천곡리), 井谷里(정곡리), 月峴里(월현리)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三谷(삼곡)이라 하여 珠山面(주산면)에 편입하였으며 박용화 선생의 出身地(출신지)이기도 하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능 골

샘실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백제때부터 陵(능)과 같은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거 북 들

동실 마을 앞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거북바위 앞들을 거북들이라 한다.

동 실

방죽안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남포5실(谷)중의 한 부락으로 동달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다. 李學榮(이학영), 李圭龜(이규구) 先生(선생)이 子孫(자손)을 訓學(훈학)하시던 곳이다.

※ 참고사항

3당 : 주산면 금당, 웅천면 붉은당, 비인면 남당

5실 : 주산면 동실, 샘실, 미산면 자라실, 남포면 고야실

방 죽 안

동실 북쪽의 초입에 지금도 사용하는 방죽이 있는 마을이다.

새 암 실(泉谷, 井谷)

동실 북쪽 마을로 샘(泉)이 많이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그릇점이 있었던 마을이다.

篁 栗 里(황율리)

朝鮮(조선)때 藍浦郡(남포군) 佛恩面(불은면) 地域(지역)인데 1914年 行政改革(행정개혁)때 篁城里(황성리), 栗洞(율동), 月峴里(월현리) 一部(일부)와 習衣面(습의면)의 희룡리 일부를 병합하여 황율리라 하여 珠山面(주산면)에 편입하였으나 任敬淳先生(임경순선생)이 사시던 곳이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산면이 되었다.

황 성(篁 城)

대나무가 많고 옛 성터가 있어 황성이라 한다. 마을 중앙에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마을 대성을 이루고 있는 풍천임씨 선조 한 분이 낙향해서 심은 나무로 500여년이 경과 하였다. 나무둘레가 두아름 높이 10여m가 된다. 윗뜸, 아래뜸, 서뜸, 안마실 4마을로 나뉘어 있다.

퇴 뫼

아래뜸 뒷산인데 옛성터가 있는 산이다.

옹 동 말(翁 洞)

황성 동쪽으로 있는 마을로 신선지여서 장수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사 모 바 위, 각 시 바 위(쪽 도 리 바 위)

밤나무골 남쪽 모랭이에 있는 사모 모양의 바위를 사모바위라고 하며 그 앞 모랫돌 건너편 야관마을에 각시바위가 있어 음양의 이치를 성립시키고 있다.

지 장 리

옛날 장터가 있던 곳이라며 지금도 이곳 땅속에 옛기와 조각이 나온다 한다. 지금은 장항선 및 서해 산업선의 간치역이 자리잡고 있다.

정 문 거 리

황성부락 아랫뜸 동구 길 옆에 이곳 풍천임씨의 조상의 한분이신 平山申氏(평산신씨)와 渶陽趙氏(영양조씨) 婦人(부인)의 烈士(열사)정문과 孝子(효자)정문이 있는 모랭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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